법화경 유포의 역사

많은 선인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키며 전한 법화경의 역사

인물

많은 선인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키며 전한 법화경.
석존의 깨달음에서 시작한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더 나아가 한반도와 일본까지 전한 역사를 법화경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중심으로 소개한다.

전교

일본
천태법화종 개조

견당사의 배를 타고 중국에 건너가
중국천태종의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사이초(最澄: 767~822년. 766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음)는 헤이안시대의 승려로, 일본천태종의 개조(開祖)이다. 오우미지방(현재 시가현)에서 태어났다. 전교대사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785년, 도다이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정식 승려가 되어 히에이산(比叡山)에 들어가 산림수행(山林修行)을 한 사이초는 히에이산에서 감진이 가져온《천태삼대부(天台三大部)》(《법화문구》《법화현의》《마하지관》)를 공부하고 천태종 사상에 마음을 기울였다. 804년, 당나라로 파견되어 견당사(遣唐使)의 배를 타고 중국에 간 사이초는 천태산에 들어가 담연(湛然: 묘락대사) 제자인 도수(道邃)와 행만(行滿)에게 천태종 문헌을 많이 얻어 돌아왔다. 이때 담연의《천태삼대부》의 주석서(註釋書)를 처음 일본에 가져왔다.
‘대승계’를 전수하는 계단의 건립에 힘쓰다
당시 나라(奈良)의 도다이사(東大寺)와 도치기현 시모쓰케 야쿠시사(藥師寺), 후쿠오카현 쓰쿠시 간제온사(觀世音寺)는 ‘천하 삼계단(三戒壇)’이라고 했는데, 천태종의 승려도 계를 받지 않으면 정식 승려로 인정받지 못했다. 사이초는 그 사찰들은 ‘소승률(小乘律)’을 전수하는 소승계단이기 때문에 대승계단을 건립해야 한다고 조정에 주장했다. 그러나 남도육종(南都六宗)이 맹렬히 반대해 ,결국 사이초가 죽고 난 뒤 7일째에 건립 허가를 받았다.
도쿠이쓰와 논쟁을 벌여
모든 사람이 성불할 수 있다고 밝히다
사이초는 법상종(法相宗)의 도쿠이쓰(德一)와 5~6년 동안 논쟁(삼일권실논쟁<三一權實論爭>)을 벌였다고 한다. 법상종의 오성각별(五性各別: 중생 중에는 불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와 성문·연각으로 정해진 자가 있어, 이러한 사람은 성불할 수 없다는 설) 사상에 대해 사이초는 법화일승(法華一乘)의 관점에서 불성(佛性)의 보편성,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법화수구》에서 ‘법화경’이 가장 우수한 경전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법화경’은 역겁수행(歷劫修行)이 아닌, 즉신성불(卽身成佛)할 수 있는 경이라고 논했다.
당시 중국을 범선으로 건너는 일은 목숨을 건 선박 여행이었다.
감진
10년에 걸친 도전, 고난에 굴하지 않고 일본에 건너가다
감진(鑑眞: 688~763년)은 중국 당대의 남산율종(南山律宗) 승려로, 나라시대에 일본으로 갔다. 불교에서 승려가 되려면 정식으로 출가한 승려 10명의 승인을 받고(삼사칠증<三師七證>), 의식을 치러야 했다. 일본에서는 불교가 전래된 이래 정식출가제도가 없었으므로, 당나라에서 수계(受戒)할 수 있는 승려를 초청해 수계제도를 정비해야 했다. 742년에 일본 승려인 요에이(榮叡)와 후쇼(普照)는 당나라에 건너가, 감진에게 일본에 함께 가자고 요청한다. 감진은 강남(江南: 양쯔강 유역)에서 4만명이 넘는 사람에게 ‘수계’를 행한 고승(高僧)이었다. 감진은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제자들과 함께 다섯 차례에 걸쳐 일본에 가려고 준비했지만 매번 실패하고, 눈병을 얻어 실명했다. 그래도 고난에 굴하지 않고 753년(66세), 여섯번째 도전 끝에 일본에 건너가 도다이사(東大寺)에 초기 일본의 정식계단(戒壇)을 설치했다. 또 감진은 일본에 건너올 때 지의(智顗: 천태대사)의《천태삼대부(天台三大部)》를 가지고 왔는데, 훗날 사이초(最澄: 전교대사<傳敎大師>)가 이를 공부해 일본천태종 성립에 크게 공헌한다.
748년에 시도한 다섯번째 출항 당시, 심한 폭풍을 만나 14일 동안 표류해 남쪽에 있는 하이난 섬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