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유포의 역사

많은 선인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키며 전한 법화경의 역사

인물

많은 선인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키며 전한 법화경.
석존의 깨달음에서 시작한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더 나아가 한반도와 일본까지 전한 역사를 법화경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중심으로 소개한다.

구마라습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으로

실크로드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에서 탄생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년/ 350~409년 두 가지 설이 있음)은 인도 서북지방의 귀족인 아버지 구마라염과 고대 서역 36국의 하나인 구자국(龜玆國: 쿠처) 백순왕(白純王)의 누이동생인 어머니 기바(耆婆)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홉살 때
인도에 유학
구마라습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렸다. 일곱살 때 어머니를 따라 출가(出家)하고, 아홉살 때 어머니에게 이끌려 평균고도 5000미터의 파미르고원을 넘어 인도에 유학했다. 아비달마(부파불교의 교학)를 배우고 천재성을 발휘했다.
구마라습이 번역한 ‘묘법연화경’ 사본
10세기 서사 (러시아동양고문서연구소 소장)

구마라습이 한역한 ‘묘법연화경’은 ‘절후광전(絶後光前, ‘공전절후’와 거의 같은 의미. 후세에도 없고, 전대에도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이라고 찬탄할 수 있다. 법화경 한역은 세 가지가 현존한다.

① 축법호 번역 ‘정법화경’(286년)
② 구마라습 번역 ‘묘법연화경’(406년)
③ 사나굴다(闍那崛多)•달마급다(達摩笈多) 공역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601년)

그때까지 중국인에게는 난해했던 대승불교의 진수를 구마라습은 간결하고 유창하게 문학적으로도 뛰어나게 번역했다.

구마라습, 18년 동안 갇혀 지내다
384년, 고명한 구마라습을 도읍 장안(長安)으로 불러들이고 싶어 하던 전진(前秦)의 국왕은 여광(呂光) 장군에게 군사 7만을 주어 서역의 구자국으로 원정을 보내 구마라습을 잡아오라고 명했다. 하지만 여광이 장안으로 돌아가던 길에 양주(凉州)에서 ‘전진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돌아갈 곳을 잃은 여광은 양주에 후량국(後凉國)을 건국한다. 구마라습은 이곳에서 18년 동안 강제로 머물렀다. 이 기간에 중국의 언어, 문자, 철학 등을 습득했다고 추정한다.
‘묘법연화경’ 등을 번역하다
401년, 후진(後秦)의 국왕 요흥(姚興)이 양주에 갇혀 지내는 구마라습을 국사(國師)의 예를 갖추어 도읍 장안에서 맞이했다. 구마라습은 혼신의 힘을 다해 불전 번역에 힘썼다. 10년도 되지 않아 ‘묘법연화경’《중론》《대지도론》등 35부 294권을 한역한다.
“내가 죽으면, 부정한 몸은 탈지라도 번역이 올바르다면 내 혀는 타지 않으리라. 혀가 타면 경전을 버려라”라고 유언했다. 413년에 구마라습이 서거하자, 유언대로 혀는 타지 않고 남았다고 전한다.(《고승전》)
구마라습은 번역을 하면서
많은 제자를 육성
번역은 승려 약 500여 명을 모아 진행했다. 구마라습은 번역하는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질문에 정중하게 대답하고 자신이 왜 이렇게 번역을 했는지, 어떠한 깊은 뜻이 담겨 있는지 강의했다. 번역하는 자리는 약 500명이 수강하는 강의 자리가 됐다. 때에 따라 2~3천명이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많은 인재를 육성했다. 이 제자들이 스승의 위업을 이어받아 중국 전역에 구마라습이 번역한 경전을 넓혔다.